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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대한민국 정부의 기자실과 기자단의 변화한 과정

by 로버트 윈 2023.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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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의 기자실은 정부,정당,기업 등의 출입처가 기자들에게 마련해준 장소입니다.기자실에 상주하는 기자들이 모여 만든 단체를 출입 기자단 또는 출입처 기자단이라 부르며,줄여서 기자단이라고 합니다.이런 정부의 기자실과 기자단에 대해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2017년도의 청와대 춘추관에서 진행된 브리핑의 모습.
2017년도의 청와대 춘추관에서 진행된 브리핑의 모습.

1.정부 부처의 기자실은 출입 기자제로 운영
 
일본에서는 이러한 한국의 단체를 기자 클럽이라 부르고 있습니다.정부 부처 기자실은 출입 기자제로 운영이 되고 있어서 출입 기자단에 가입해야 기자실을 이용할 수가 있습니다.출입 기자단 가입은 주로 신문사와 방송사에게만 허용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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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실의 배타적,폐쇄적인 운영은 끊임없이 비판받았으며 인터넷의 보급으로 언론사가 급격하게 늘어나 기자실 운영을 둘러싼 갈등이 표면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노무현 정부는 2003년 개방형 브리핑룸 제도를 도입하였고 사실상 정부 부처 기자실은 폐지가 되었습니다.이에 대해 언론사와 기자들은 거세게 반발을 하였고 정부와 갈등을 겪었습니다.하지만,이명박 후보의 대통령 당선 이후 구성된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기자실을 부활시키기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2.1920년~1972년까지의 겪어온 역사

1920년대부터 조선인과 일본인 기자들은 일본의 기자 클럽의 영향을 받아 출입처에 기자단을 결성하기 시작을 하였고,체신국에 출입하는 기자들과 체신국의 관리들이 공동으로 구성한 광화구락부,이왕직에 출입하는 기자들이 만든 이화구락부 등이 결성되었습니다.해방 직후에는 미군정의 기관에 출입하는 기자들이 기자단을 조직을 했고,1950년대까지 언론 환경에는 큰 변화가 없었으나,1961년 5·16 군사 정변 이후 언론 환경은 급변하게 되었습니다.4·19 혁명 이후 언론사가 난립하여 사이비 기자가 생기고 출입 기자단의 부패가 알려져 언론 매체와 기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군부는 이것을 명분으로 삼아 언론 매체를 부패 집단으로 규정하고 강력하게 통제하려 하였습니다.박정희 정부는 자의적으로 청와대에 출입하는 기자의 수를 조정하여 쉽게 언론 매체와 보도를 통제하기 위하여 1963년 청와대에 기자실을 설치하고,출입 여부를 청와대가 승인하는 제도를 도입을 했으며,당시 기자실 이외에 보도 자료를 얻을 방법이 없던 기자들은 정부의 정책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으며,이때부터 정부 기관 대변인의 발표를 기자단이 취재하는 것이 관행이 되었고,이 관행은 1967년 정부가 각 부처에 공보관을 공식적으로 두어 제도로서 정착을 하였습니다.1972년에 박정희 정부는 전국의 기자에게 고유한 번호를 기재한 프레스 카드를 발급을 하였고,카드 발급을 제한하여 기자의 감원을 하게 되었습니다.당시 주간지나 월간지 기자에게는 프레스 카드를 발급하지 않았는데 이때부터 기자실이 서울에서 발행되는 신문과 방송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경향이 강화가 되고,기자실의 배타적,폐쇄적 이용이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한편 출입 카드를 도입한 후,박정희 정부는 행정 부처에 설치된 기자실 47개를 18개로 여기에 출입하는 기자 790명을 465명으로 감축을 하였습니다.기자실 제도는 전두환 정부의 언론 정책으로 더욱 공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고,정부는 언론 통폐합을 통해 언론 매체를 줄이고,보도 지침을 이용하여 효과적인 정보 통제 체계를 구축을 하였습니다.반면 남은 언론 매체에게는 시장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특혜를 제공하였으며,이로 인하여 언론 매체의 경쟁이 사라지고 기자실과 기자단은 뉴스 보도를 위한 취재 시스템에서 특혜를 공유하는 배타적인 조직으로 변질이 되었습니다.

3.1998년 언론 환경의 변화

1988년 노태우 정부가 출범을 합니다.대통령 직선제 개헌으로 언론 환경은 다시 급변합니다.신문의 창간과 복간으로 경쟁이 치열해졌고,엠바고를 깨는 일도 종종 발생을 하였습니다.이런 상황에서 그 전에는 규모가 훨씬 커도 드러나지 않았던 기자들의 촌지 혹은 향응 수수가 사회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1991년 보건사회부에 출입하던 기자단이 추석 전후에 제약,제과,화장품 업계의 기업과 대우재단,현대아산재단 등의 단체로부터 추석 떡값과 해외 여행비의 명목으로 8,850여만 원을 거둬 나눠 쓴“보사부 촌지 사건”이 발생을 하였습니다.연루된 언론사들은 이례적으로 사과 기사나 사고를 실었고,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은 기자단을 탈퇴하거나 가입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합니다.그러나 이러한 선언은 점차 잊혀지고 언론사들은 다시 기자단에 가입을 합니다.

 

4.2003년 개방형 브리핑룸 제도를 도입

노무현 정부는 2003년에 기자실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개방형 제도를 도입을 합니다.출입 기자제로 운영되던 정부 부처 기자실을 개방하고 등록제로 운영하는 브리핑룸과 송고실로 개편을 합니다.2003년 4월 16일 문화관광부가 기자실을 개방한 것을 시작으로 단계적으로 다른 부처도 기자실을 개방을 합니다.그러나 일부 부처의 송고실이 과거 기자실처럼 출입 기자단에게 독점되는 현상이 발생합니다.그래서 국정홍보처는 2007년 5월 22일에 기존의 브리핑룸을 21개에서 15개(합동브리핑실의 확대 개편)로,기사송고실을 20개에서 9개로 조정하는 취재 지원 시스템 선진화 방안을 실시한다고 발표하였습니다.그러나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이 문제가 불거지게 되자 정동영을 비롯한 이명박,권영길,이인제,문국현,이회창 등 유력 대선 후보들이 참여정부의 개방형 브리핑룸 제도에 대해 반대하고 특히 참여정부에서 통일부 장관을 지냈던 정동영 후보는 “취지에는 공감하나 지금 같은 방식에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취재의 자유가 보장돼야 한다고 했습니다.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하도록 접근권을 확실히 열겠다”라며 반대를 했습니다.제17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명박 당선인과 인수위원회는 참여정부의 취재지원 선진화 방안을 없애고 각 부처 기자실을 원상회복키로 하였습니다.또 이를 추진한 국정홍보처를 폐지키로 결정을 합니다.

 

5.그리고 현재의 정부 기자실

윤석열 대통령은 당선 이후 대통령 관저를 청와대에서 용산 국방부 청사로 옮기기로 하였습니다.청와대가 그 역할을 다하면서 춘추관도 1990년 이래 32년 만에 프레스센터로서의 기능을 마치게 되었고,당선인 신분이던 2022년 3월 20일,윤석열과 인수위에서는 용산으로 청사 이전 후 청사 1층에 기자실과 기자회견장을 마련하겠다고 밝혔습니다.이는 기존에 춘추관이 대통령 집무실과 별개의 동으로 떨어져 있던 것과 차별화를 시도 하였습니다.같은 해 5월 10일 청와대가 전면 개방된 이후,5월 23일에는 춘추관이 영빈관과 함께 관람객들에게 개방이 되었으며,청와대가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조성되면서 8월 31일에는 언론 브리핑 장소로 사용되던 춘추관 2층에서도 장애인 작가들의 그림 전시회가 열렸습니다.해당 전시회는 청와대에서 열리는 첫 전시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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